ICPC 월드 파이널 참석 후기 — Привет!
버거킹을 먹은 후에는 인터넷으로 미리 코로나 검사를 예약하고 인천공항 코로나 검사센터에서 검사를 받았습니다. 당시에는 보건소에 가면 누구나 무료로 코로나 검사를 받을 수 있던 시절이었지만, 보건소 검사결과는 언제 나올지 모르는 반면 러시아 입국 시각을 기준으로 72시간 내에 받은 검사 결과가 필요했기에 한 명 당 10만 원 가량의 거금을 들여서 검사를 받았습니다.
비행기는 오후 11시 반에 출발합니다. 오후 1시에 PCR 검사를 받고 무려 10시간을 때워야 하는 슬픈 상황입니다.
사실 레드시프트가 해외 대회를 치러 간 건 처음이 아닙니다. 2019년에 태국 방콕 리저널에도 참가했었는데요, 당시 제가 팀노트 25장 × 3권을 무려 잉크젯 프린트로 인쇄하느라 늦어서 공항철도에서 내리자마자 게이트까지 뛰어갔는데도 비행기를 놓칠 뻔 한 적이 있었던지라 이번엔 일찍 공항에 왔습니다.
카드 셔플 문제의 출제자 semteo04는 서강대학교 마술 동아리 MASU-Z 부원입니다. 시간을 때우면서 신기한 마술들을 볼 수 있었어요.
제가 모스크바 여행을 다녀온다고 하니 solved.ac 일러스트 작가님이 여행객 한별이 아크릴을 선물해주셨습니다. 제가 평소에 메고 다니는 가방이랑 같은 걸 메고 있네요. 저는 정말 성덕이 아닐까요? 이 글을 빌어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
오래 걸어다니다 보니 피곤하고 덥고 온 몸이 땀 범벅이 돼서 샤워할 수 있는 곳을 알아보다가, 면세영역에 샤워실이 있다고 해서 일단 출국심사를 받았습니다.
오른쪽이 출국심사대입니다. 심각한 코로나 상황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사람이 몇 명 안 보이는 공항 면세영역입니다. 터키나 러시아는 어떤 상황일지, 우리가 다녀오는 동안 우리나라는 어떻게 될지 걱정이 앞섭니다. 면세구역 중앙이라 아직 몇 명 보이기는 하지만 게이트와 가까워질수록 우리 말고는 아무도 없어서 비현실적인 기분이었습니다.
그리고 아쉽게도 코로나 상황 때문에 샤워실은 문을 닫았더라구요.
그렇게 이 시국에 해외에 나가보게 되었습니다.
앞선 포스트에서 언급했던 것과 같이 이 여정은 터키항공 TK091편으로 튀르키예(당시 터키)의 수도 이스탄불까지 날아가고, 여기서 환승해 터키항공 TK413편으로 러시아 브누코보 공항까지 가는 여정이었습니다. 여정표만 보면 5시간 반 정도만에 갈 수 있을 것 같지만 튀르키예와 한국의 시차는 6시간이라 TK091편만 무려 11시간 반이나 걸립니다. 가 본 곳이 전부 아시아뿐이라 6시간 초과의 비행기를 타본 적 없는 저로서는 걱정 반 설렘 반이었어요. 와 내가 드디어 시차 적응이라는 걸 해볼 수 있다니!
운좋게도 제가 창가 자리라서 인천 야경을 찍을 수 있었어요.
11시간 반 앉아 있으면 굉장히 배고프죠. 밤에 출발한 비행기라서 저녁 기내식이 나왔습니다. 공항에서 저녁을 먹었지만 그냥 또 먹기로 합니다.
기내식은 비빔밥과 물고기 요리 중 하나를 고를 수 있었고 비빔밥은 외국 항공사 기내식 치고는 꽤 맛있었습니다. 터키항공은 튀르키예의 자존심인가?
심지어 이 비행기는 (꽤 비싼 값을 주면) 엄청 느린 위성 인터넷을 쓸 수 있게 해 줍니다. 기내에서 여자친구에게 깜짝 밤인사를 전할 수 있었어요. 트위터를 할 수 있는 속도는 아니었고….
그렇게 밥을 먹고 편하게 잤습니다. 자고 일어나니까 밥을 한 끼 더 줍니다.
11시간 반 비행이라 기내식이 두 개 나오는 것 같네요. 약간 느끼하지만 맛있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한나절동안 정말 아무것도 안 하고 앉아만 있는 거라 약간 사육당하는 느낌이 들더라구요. 하지만 피곤했기 때문에 먹고 또 바로 잤어요.
얼마 안 잤는데 튀르키예에 거의 도착해 있었습니다. 11시간 알차게 보냈네요! 답답한 비행을 가장 알차게 보낼 수 있는 방법은 바로 수면이 아닐까 싶네요.
굉장히 숙련된 파일럿이었는지 비행기 착륙을 무슨 고급 세단 승차감이 들도록 할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습니다. 터키항공은 신인가?
아무튼 러시아에 가자마자 호텔에서 씻겠다는 다짐으로 가득한 네 명은 지친 몸을 이끌고 환승을 합니다.
이스탄불 국제공항은 웅장한 별천지였고 튀르키예는 다른 세계에 온 건가 싶을 정도로 사람이 많았습니다. 당시 우리나라 방역 상황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인파입니다.
샤워실 안내판이 눈에 띄고 면세점 내에 제가 정말 좋아하는 쉐이크쉑도 있었지만 환승 시간 간격이 그렇게 여유가 있는 편은 아니라서 바로 게이트로 이동하기로 합니다.
현지시각 새벽 5시에 도착했고 새벽 7시 45분 비행기를 타야 되기 때문에 날이 밝아오는 걸 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와의 시차는 6시간이지만 비행기에서 너무 잘 잤는지 시차는 이미 적응해버렸습니다.
최종 목적지인 모스크바로 출발합시다! 이번엔 두 시간만 가면 됩니다.
보통 서울-제주 비행기는 기내식을 주지 않는데 터키항공 TK413편은 두 시간 비행임에도 불구하고 아침 기내식을 줍니다! 졸지에 아침 기내식을 두 개 먹어버린 돼지가 되었습니다. 꿀꿀. 근데 맛있었어요. 터키항공은 정말 최고의 항공사가 아닐까….
Привет, Россия!
긴 여정 끝에 드디어 러시아의 브누코보Внуково 국제공항에 도착했습니다. 셰레메티예보Шереметьево가 인천공항이라면 브누코보는 김포공항쯤의 포지션인 것 같습니다. 튀르키예는 가까운 나라니까요.
입국심사장으로 이동합니다. 러시아는 제1세계 국가들에게는 아직도 까다로운 입국 정책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와 전쟁하기 전까지는 한국의 이미지는 굉장히 좋기 때문에 입국심사는 큰 걱정 없이 통과할 거라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두 명은 별 문제 없이 통과했습니다. 영어를 잘 모르는 눈치였는데, 영어로 몇 가지 물어보는 시도를 하더니 그냥 들여보내줬습니다.
하지만 두 명이 통과하고 나니까 입국심사대의 문이 전부 닫히고 다른 두 팀원이 입국심사대 저편에 갇혀 버렸습니다 …?
영문도 모른 채 30분동안 입국심사대를 경계로 두고 불안에 떨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물어보니 함께 입국한 다른 한국인의 일행으로 오해받아서 여권을 압수당하고 이것저것 물어봤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도 아니고 남의 나라에서 이런 일을 겪다니 국제 이산가족 비슷한 게 될까 봐 정말 무서웠어요.
무서움은 코카-콜라 바닐라로 녹이기로 합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모스크바
모든 입국 과정을 무사히 마치고 공항 로비로 나왔더니 ICPC 자원봉사자 분들께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브누코보는 모스크바와는 조금 거리가 있는 곳이라 모스크바 중심에 있는 숙소로 가려면 꽤 이동해야 합니다. 다행히도 ICPC에서 택시를 지원해 줘서 편하게 이동할 수 있었습니다.
러시아판 카카오+네이버라고 할 수 있는 얀덱스Яндекс 택시를 두 대 불러 이동했습니다. 얀덱스는 검색엔진 회사인데 번역도 하고 택시도 하고 배달도 하고, 게임 플랫폼도 있고, 러시아 국내에서 구글보다 점유율이 높은 것까지 판박이입니다. 하나 다른 건 우리나라의 모든 곳에서 카카오 라이언 캐릭터를 볼 수 있는데 얀덱스는 캐릭터는 없는 거 같다 정도네요.
고속도로를 타고 크라운 플라자 호텔로 가는 길에서 차들을 많이 볼 수 있었는데 그 중에는 한국 중고차도 간간히 보였습니다. ‘최대적재량 4500kg’라는 한글이 적힌 현대 트럭이 인상깊었어요.
모스크바는 이렇게 세 개의 큰 순환도로로 이뤄져 있습니다. 중앙에 있는 순환도로 안에 크렘린과 붉은 광장이 있고, 이 근처에서 ICPC 월드 파이널이 개최됩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브누코보 공항은 김포공항쯤 되고, 대회 장소는 광화문 근처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이제 모스크바 면적은 서울의 4배에 달하기 때문에 광화문 근처에서 이런 대회를 열 수 있는 공간이 있는가 하면 그건 또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여하튼 그렇습니다.
호텔은 대회 장소에서 그렇게 멀지 않은 곳이었습니다. 역시 ICPC 8연속 우승을 차지하고 있는 러시아의 심장 모스크바에서 열리는 ICPC여서 그런지 만반의 준비를 한 것 같다고 느꼈습니다.
모스크바 강변을 따라 지어진 러시아 건축 양식의 건물들이 보이는 멋진 뷰가 있는 객실이었습니다. 그림같이 아름다워서 눈을 뗄 수가 없었어요.
모스크바 산책
첫째 날에는 다들 시차적응도 해야 했고 십 몇 시간동안 비행기 타고 고생하느라 많이는 못 돌아다녔습니다. 다만 멀리까지 와서 호텔에만 있기는 아까우니까 산책을 나가기로 합니다.
개인적으로 공공디자인에 관심이 많아서 눈여겨봤는데 모스크바의 그것은 꽤 마음에 들었습니다. Moscow Sans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런 디자인 언어가 대중교통과 거리 안내판 등 많은 곳에 적용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마스크를 안 쓰고 다닙니다. 실내에서도요! 당시는 2021년 9월이었고 우리나라는 음식점에서 식사를 오후 9시까지밖에 할 수 없었던 시국이었던지라 적잖은 문화충격을 받았죠.
숙소 근처 스몰렌스카야Смоленская 역까지 걸어가서 지하철을 타 보려고 역에 들어가서 노선도를 구경하고 있으니, 역무원 분께서 다가오셔서 미숙한 영어로 노선도에 그려진 붉은 별을 가리키면서 ‘여기 가면 멋진 거리도 있고 레닌 동상도 있다’ 같은 추천을 해주셨지만 여기까지 걸어온 것만 해도 힘에 부쳐서 내일 가 보기로 합니다.
스몰렌스카야 근처에는 아르바트Арбат 거리가 있습니다. 아르바트는 거리의 화가들이 많기로 유명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돌아오는 길에 캔버스에 유화 그림을 그리는 화가 분을 뵐 수 있었어요. 거리에서 그림을 그리는 광경은 우리나라에서는 잘 볼 수 없었던 광경이라서 유럽에 왔다는 실감이 나게 해 주는 무언가였네요.
모스크바 음식
저희와 비슷하게 온 경북대학교 Catdriip 팀과 연락이 닿아서 근처 식당에서 저녁을 먹기로 합니다. 찾아간 곳은 서강대학교 프로그래밍 대회 문제 Ресторан의 소재가 되기도 했던, 레스토랑 마트료시카Ресторан «Матрешка»입니다.
모스크바 강을 따라 걸어가면서 모스크바 야경을 볼 수 있었는데 밤의 모스크바도 엄청 예뻤습니다. 첫 번째 사진 왼쪽의 으리으리한 건물은 호텔이라고 하네요. 레스토랑 앞에는 마트료시카 조각상이 있었어요.
음식점에 들어오니 카운터에서 외투를 보관해 주시고 신발장처럼 번호표를 나눠주셨습니다. 이것도 신기한 부분이었는데, 며칠 살아보면서 느꼈던 부분이라면 러시아 사람들은 외투를 입고 대신 안에 따뜻한 옷을 입지는 않는 것 같았습니다. 실내 온도가 높은 대신 외투 보관소가 대부분의 시설에 있었던 느낌이었어요. 어쩐지 외투 입고 따뜻하게 입으니까 많이 덥더라구요.
dogdriip님과는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어서 자주 뵈었지만 exqt 님과 skeep194 님은 초면이었습니다. 이쪽도 여러 사정으로 인해 2019년 서울 리저널 팀 구성과는 약간 다른 구성으로 출전했습니다.
메뉴판에 약간 의외의 음식이 보이는데, 러시아에는 의외로 전통 만두Пельмени가 있고 꽤 대중적이라고 합니다. 유럽과 아시아의 영향을 모두 받은 결과일까요?
저는 닭고기 포자르스키 코틀레타Пожарские котлета을 주문했습니다. 이름은 뭔가 치킨까스일 거 같고, 생긴 것도 실제로 도깨비방망이 같은 걸 끼얹은 치킨까스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되게 부드러운 다진 닭고기 튀김입니다.
맛은 예상할 수 있는 맛보다 맛있고, 약간 느끼했고.. 식감은 고로케 같은 느낌이었어요. 고로케도 좋아하고 닭고기도 좋아해서 개인적으로는 꽤 마음에 들었어요! 아마 서울에서 러시아 식당을 갈 일이 생긴다면 메뉴판에서 찾아보게 될 것 같네요.
물이 부족해서 더 달라고 요청했는데 이게 나중에 영수증에 떡하니 적혀 있었다는 점은 조금 당황스러웠네요. 심지어 에비앙… 무려 2,070루블, 당시 가격으로 33,120원이 7인 식사의 물 값으로만 나갔다는 건데… 이럴 때는 한국이 역시 최고인 것 같고 그렇죠.
러시아는 음식점 9시 영업제한 같은 게 따로 없었어서 늦게까지 맛있게 먹고 야경을 감상하며 천천히 숙소로 돌아왔습니다.
모스크바에서의 하루
아직 ICPC 공식 일정 시작까지는 하루 더 남은 관계로 다음 포스트도 아마 관광 이야기가 될 것 같네요. 1년만에 다시 쓰려니까 기억이 조금씩 사라져가는데 빨리 쓸 걸 하는 후회가 남습니다… 빨리 ICPC 얘기 하고 싶은데 어떻게 대회가 6일치 일정이나 되는지 모르겠네요. 여유가 되는 대로 더 써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