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CPC 월드 파이널 참석 후기
여기 졸업을 앞두고 있는 사람 두 명과 펍지 엔지니어 한 명, 넥슨 엔지니어 한 명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어쩌다 이런 시국에 인천공항 버거킹에 모이게 되었을까요.
세렌디피티
휴가를 쓰고 호캉스를 온 날 조식을 먹으러 가려던 찰나 이상한 메일을 받게 됩니다. Fwd: ICPC World Finals Moscow – Sogang University라는 제목의 메일입니다. 월드 파이널? 대체 왜? 하는 심정으로 열어본 메일에는 믿기 힘든 내용이 적혀 있었습니다.
‘서강대학교 ICPC 관련인들께, […] 팀 Redshift가 모스크바에서 열리는 월드 파이널의 참가 자격을 얻게 되었습니다. 10월 1일에서 6일까지 모스크바에 올 수 있으면 됩니다. 한국에서 코로나19가 유행하면서 모스크바까지 오는 것이 힘들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아직까지 참석 가능성에 대한 회신이 없는 관계로) 팀이 정말 희망이 없는지 ICPC 매니저께서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임 코치님께 회신을 요청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월드 파이널이라니? 내가? 왜?
2년 전에 ICPC 서울 리저널에서 8위에 오른 적이 있습니다. 8위까지 티켓이 내려갔다니, 싶지만 중요한 건 이게 아닌 것 같습니다. 침착하게 아래에 포워딩된 메일을 읽어봤습니다.
‘안녕하세요 코치님, […] 8월 9일 오후 11:59 CST까지 회신 부탁드리겠습니다. 이 때까지 회신이 없으면 참가하지 못하는 걸로 간주하도록 하겠습니다. 질문이 있으면 자유롭게 회신 부탁드려요. 월드 파이널에서 뵙길 바라겠습니다!’
맙소사, 오늘은 8월 12일인데…
빠르게 머리를 굴려 봅니다. 스팸메일은 아닌 거 같다. 진짜 월드 파이널에 진출한 거 같긴 하다. ICPC 본부에서 8월 9일까지 답장을 주라고 했는데, 8월 12일에 이런 메일이 왔다. 그것도 학회 홈페이지 맨 밑에 적힌 메일 주소로 왔다.
그러면 제가 할 일은 명확했습니다. 최대한 빨리 회신을 보내야 합니다. 바로 코치 교수님과 팀원들에게 전화를 걸어서 협조를 구했습니다.
첫 번째 산: 참가 신청
2019년 레드시프트는 17학번 박건(lvalue), 17학번 이준석(semteo04)과 저(shiftpsh)로 이루어진 팀이었습니다. 같은 나이라서 서로 편하게 반말하고 있어요. 글을 읽고 계신 분들이라면 이름보다는 핸들이 더 익숙할 테니, 앞으로는 핸들로 적도록 하겠습니다.
semteo04는 펍지에서 산업기능요원으로 복무 중입니다. 그렇다는 건 보통 평일 아침에 일어나 있고, 따라서 전화를 받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누구보다 경쟁 프로그래밍에 진심인 친구여서 아마 월파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휴가를 쓰고 비행기에 함께 오를 것입니다. 그리고 몇 분 안 지나 제가 옳게 봤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lvalue는 졸업하고 KAIST AI대학원에서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아마 아침에 안 일어나 있을 것입니다. 평소에도 전화를 안 받기로 유명합니다. 나중에 연락하기로 합니다. 다행히도 트위터 맞팔이라, 멘션이나 DM을 보내면 곧잘 확인할 것입니다.
코치 교수님께서는 제 어셈블리프로그래밍 교수님이셨는데, 당시 러시아발 해외입국자는 14일 자가격리가 필요했기 때문에 안타깝게도 본인께서는 참석하지 않길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이후 받은 lvalue의 연락에서 연구하느라 바빠서 참석하기 어려울 것 같다는 답변을 들었습니다.
이렇게 시작부터 두 가지 문제가 생겼습니다.
- 코치가 참석할 수 없다면 팀의 참가자격은 유지되는가.
- 팀원이 참석할 수 없는 경우에도 그러한가.
다행히도 예외적인 경우였기 때문에 팀원을 2019년 혹은 2020년 리저널 참가 이력이 있는 학생으로 대체 가능했으며, 코치가 참석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답변을 받았습니다.
2021년 레드시프트는 lvalue 대신 전해성(seastar105) 선배와 함께 UCPC에 출전해서 5등상을 받은 바 있습니다. 이 구성으로 다시 출전하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seastar105 선배께서는 당해년도 리저널 본선 출전 이력이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학회 슬랙에서 최대한 빠르게 모집했습니다. 이윤제(yjyj1027) 선배와 이상원(gumgood) 선배께서 빠르게 연락을 주셨습니다. gumgood 선배께서 더 빠르게 연락을 주신 관계로, 이렇게 모스크바행 레드시프트가 결성되었습니다. 메일을 받고 7시간만입니다.
이후 임지환(raararaara) 선배께서 co-coach로 오시길 희망하셔서, 이렇게 4명이서 여행 계획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티켓은 10위(UNIST Underdog 팀)와 11위(경북대학교 Catdriip 팀)까지 내려가서 한국에서만 7개 팀이 출전하는 유례없는 해가 되었습니다. 대회 참가를 위해서는 예방접종을 완료해야 했는데, 아시아태평양 지역 내에서 한국과 일부 나라를 제외하고는 백신 수급 상황이 좋지 않거나, 러시아발 입국자에 대한 자가격리 조치가 강력했거나, 아예 입출국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한국의 비교적 나은 방역 상황으로 인해 운좋게 티켓을 얻었다고 생각합니다.
두 번째 산: 백신
사람들은 종종 제 장점을 강력한 추진력을 가졌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반대로 말하면 앞만 보고 가느라 사소한 것들을 놓치는 건 약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일단 참가할 수 있다고 질러놨지만…
…출국 전에 예방접종을 완료해야 했습니다. 출국 예정일은 9월 말, 지금은 8월 12일이었습니다. 50일가량 남은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fully vaccinated의 의미는 ‘접종 완료 후 14일 경과’이고, ‘접종 완료’는 2차접종이 필요한 백신의 경우 2차접종까지를 의미하기 때문에 2차접종을 36일 안에 받아야 한다는 뜻이 되었습니다.
네 명 모두 1차조차 미접종이었습니다. 당시 Pfizer 백신은 1차와 2차접종 사이 간격이 6주(=42일)였고, 그조차도 접종받기 너무나 어려웠습니다.
먼저 정부의 도움을 얻는 방법을 알아봤습니다. 질병관리청까지 올라갔다 내려온다고 합니다. 왠지 오래 걸릴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ICPC는 소관부처가 어디일까요? ICPC는 경제활동일까요?
초청장이 있긴 하지만 여권번호가 적혀 있지 않아 아마도 승인해주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도 일단 서류를 작성해 보냈습니다.
하지만 만에 하나 불승인되면 출국할 수 없게 됩니다. 불확실한 도박에 걸 수 없었습니다. 모두가 머리를 싸매면서 각자의 방법으로 갖가지 채널로 문의했습니다.
그러던 중 다행히도 저희 어머니께서 동네 병원에 직접 전화를 걸어 예약을 성공하셨습니다. 같은 방법으로 저뿐만 아니라 팀원 모두 동네 브루트포싱으로 1차접종 예약에 성공합니다. 접종일은 바로 이틀 후인 8월 14일이었습니다.
8월 14일은 UCPC 본선이기도 했습니다. 타이레놀 한 알을 먹고 바로 서강대 앞 스터디 카페로 달려가 UCPC 본선을 치뤘습니다.
1차접종은 가능한 한 최대한 빠르게 했지만 2차접종을 앞당기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당시 Pfizer 백신은 6주 후에 접종이 가능했습니다.
다행히도 접종 간격을 앞당기는 것은 보건소에 문의를 넣으면 비교적으로 쉽게 처리할 수 있었습니다. 양천구보건소에 수십 번 전화를 시도한 끝에 접종 간격을 4주로 단축할 수 있었습니다. 팀원 모두가 9월 11일에 2차접종을 완료했고 9월 말 출국 일정에 차질이 없게 되었습니다.
세 번째 산: 여행 일정과 경비
semteo04와 저는 산업기능요원으로 복무 중입니다. 그게 무슨 뜻이냐면 대학생이지만 직장에 다니고 있다는 뜻이고, 그게 무슨 뜻이냐면 여행을 다녀오려면 휴가를 써야 된다는 뜻입니다. 남은 휴가일 수를 고려해서 여행 일정을 잘 짜야 합니다.
또 하나 문제는 여행 경비였습니다. ICPC에서 지원해 주는 것은 대회 기간 중의 숙식 비용뿐이었습니다. 대회 기간을 벗어난 비용과 비행기값은 우리가 부담해야 했고, 이는 결코 만만한 비용은 아닙니다.
학교의 힘을 빌리기로 합니다. 방콕 리저널에 참가했을 때
‘㉠학교 대표가 아니라서 지원해줄 수 없다, ㉡학교 대표로 중국(2010년 월드 파이널) 갈 때는 지원해줬으니 나중에 ㉢학교 대표가 되어 와라’
는 말을 듣고 살짝 분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제는 학교가 뭐야 국가대표가 되었으니 당당히 지원해 달라는 연락을 드렸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학교 대표가 되더라도 시국에 학교가 지원을 해주는 것도 학교 입장에서는 부담스러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 백신 접종 간격을 4주로 단축시키기 위해 + 휴가를 쓰기 위해 당장 항공권이 필요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렇게 고민하던 찰나 정말 감사하게도 ㉡학교 대표의 최백준(baekjoon) 선배께서 도와주실 수 있다는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그렇게 외교부 홈페이지를 바쁘게 뒤져보면서 경유 노선을 찾아봤습니다. 유력 후보를 조사한 결과 다음과 같았습니다.
- (모든 나라) → 러시아: ICPC에서 특별 비자를 발급해 줄 예정
- 한국 → 폴란드: 도착 후 24시간 이내 출국(경유) 시 자가격리 면제
- 한국 → 터키: 접종확인서가 있는 경우 자가격리 면제
- 한국 → 프랑스: Pfizer, Moderna, AstraZeneca 백신 2회 접종 후 2주 경과
- 한국 → 네덜란드: 접종확인서가 있는 경우 자가격리 면제
따라서 한국 → 러시아, 한국 → 폴란드 → 러시아, 한국 → 터키 → 러시아 중 하나를 타는 게 이상적이어 보였습니다. 가는편으로는 출발 시간이 제일 괜찮아 보였고 최단 소요시간이 붙어 있었던 폴란드항공을 타고 가기로 합니다. 백신 접종 연장을 위해 항공권이 당장 필요했고, 제가 당장 보유 현금은 제일 많았기에 일단 결제했습니다.
그리고 오는편은 가격이 싼 터키항공으로 예약했습니다. 항공권 예약을 마치고 백신접종 기간도 단축시키고 휴가도 썼습니다. 미필인 semteo04와 저는 국외여행허가서 신청을 완료합니다. 남은 휴가 8일 모두를 러시아에 쏟아부었습니다. 다만…
네 번째 산: 지원 불가, 그리고…
법인카드 결제분만 지원이 가능하며, 그 중에서도 재학생에게만 지원이 가능하다는 답변이 돌아왔습니다. 이미 결제했기 때문에 지원이 힘들다는 것이었습니다. 백준님께는 죄송하게 된 일이지만 사실 그렇게 큰 충격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습니다.
당시 러시아는 경유항공편의 경우 경유지를 제한하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 폴란드가 없었습니다.
ICPC 운영 측에 비자 발급을 도와줄 수 있느냐고 여쭤봤더니 ‘러시아 정부 차원에서 입국승인 행정명령을 내렸기 때문에 안심해도 좋다’는 답변이 돌아왔습니다. 불안하지만 일단은 안심합니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습니다.
오는편이 연착되었습니다. 연착 자체는 큰 문제가 아니지만, 휴가를 전부 소모해버려 이대로면 산업기능요원 복무가 연장되고 맙니다.
결국 불안했던 가는편을 포함해 모든 항공권을 취소하고, 새로 여정을 짜기로 했습니다. 가는편은 9월 28일 터키 경유 밤비행기로, 오는편은 10월 8일 대한항공 직항으로 결정합니다.
새로 항공권을 결제하면서 2명분의 경우 학과 지원을 받을 수 있었고, 나머지 2명분의 경우 네 명이 똑같이 분담하기로 결정했습니다(~32만 원). 싼 값에 러시아 다녀오는 셈 치고요.
ICPC 대시보드에는 호텔 예약 정보 조회 기능도 있습니다. 신기하죠.
호텔은 대회 기간 중에만 지원되었습니다. 여정 중에 대회 기간이 아닌 기간의 경우 따로 결제했습니다. 다행히도 따로 결제한 날들과 지원받은 날들의 예약을 합쳐 주셔서 방을 옮기지 않고 지낼 수 있었습니다.
이제 공항에서 PCR 테스트만 받고 결과지를 챙겨 가면 모든 준비는 끝납니다. PCR 검사 결과가 나올 때까지는 6시간가량이 걸린다고 합니다. 가는편을 밤비행기로 변경한 덕분에 당일에 검사를 받아도 문제없게 되었습니다.
이스탄불으로
한국을 떠나기 위한 모든 준비를 마쳤습니다. 출국심사를 마치고 경유지인 이스탄불로 이동합니다.
공항 도착 이후의 이야기는 언제가 될 지 모르는 다음 포스트에서 정리해 보겠습니다.